2022년 공간의 실험을 마치며

아르택트랩 <공간너머> 프로젝트 작업노트 중에서

공간너머

12/31/20220 min read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 진다. 특히나 만남은 그러하다. 우리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를 만나는 물리적인 경험에 있어서, 그 바탕에는 시간이 포함되지 않는 공간이 없고, 공간이 포함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적으로 분리될 뿐,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씨실과 날실처럼 항상 하나로 얽혀져 있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보이지 않는 음성_목소리 간의 만남은 어떠할까?

신체 이미지가 없는 음성은 실제 시각적인 경험의 공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진동으로 여전히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내 몸 안의 공간을 울리며 특유의 색깔을 입은 목소리가 상대방을 향한다. 목소리는 상대방 귀 속에 마련된 세밀한 공간을 울리며, 인식된다. 울림 속에 다양한 정보들도 담기지만, 눈을 속일 수 없는 섬세한 감정들이 담겨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만남의 시공간은 서로에게 새로운 감각이 된다.

이러한 목소리 간의 만남에 상상의 공간을 입혀보면 어떨까?

연극 고유한 특징은 바로 관객이 빈 무대를 채워내는 상상력이라고 본다. 나무 막대기 하나를 잎사귀가 무성한 푸른 나무로 혹은 앙상한 가시 덤불로, 혹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닷 속 거대한 은빛 돌고래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객의 상상력이다. 이러한 연극적인 상상력이 무대 위의 소품 막대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배우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 “막대기”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어떠할까. 관객들에게 봐야하는 것들을 제공하는 연극이 아닌, 관객이 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발견해 내어 볼 수 있도록 믿음을 주는 연극은 어떠할까.

그리고 그 대상 관객이 창의력이 더욱 말랑말랑한 시기의 청소년들이라면 어떠할까.입시 준비가 한창인 정답을 찾기에 바쁜 청소년들과 함께,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예술이라는 바탕 위에서, 참여자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입으로 뱉어 내고 있는 모든 것이 이 작품의 한 조각을 구성하게 된다는 참여자 중심의 공연 예술, 특히나 하나의 규칙과 테두리를 가지고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놀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공동체성과 유희성을 담아 시각을 배제한 몰입으로의 안내를 위해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결정했다.

온라인의 만남에 앞서, 시각적인 만남, 촉각적인 만남 외에도 청각적인 만남이 있음을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전화기 세대가 아닌 스마트폰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전화 통화 감각은 기성 세대들과 다르다. 화상 통화를 할 수 없고, 문자나 채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안적으로 선택하는 음성 채팅 수준에 머무는 통화 감각은 정보 전달의 목적 이외에는 불필요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감각이다. 그러나 전화에 메여서 삶의 필수적인 다양한 감정들을 전달하며 살았던 이전 세대들에게 청각의 만남은 스마트폰 세대보다 훨씬 더 열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낯설게 만나는 이들을 어떻게 오롯이 청각적인 만남으로 연결시켜 줄 수 있을까?

위와 같은 궁금증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 <공기와 꿈>에서 “상상적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진정한 시인은 상상력이 하나의 여행이기를 원한다. 그러니 각기 시인은 자기 나름대로 우리에게 여행에의 초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초대에 응함으로써 우리는 부드러운 자극 -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에게 유익한 몽상, 진정 역동적인 몽상을 작동시키는 그런 자극을 우리 존재의 내밀한 곳에 받아들이게 된다. (...)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의 운동을 드러내게 해줄 것이다.“

이로써, 하나의 단편적인 활동보다 구체적이고 낭만적인 비유로 하나의 여행이라는 컨셉트를 생각했다. 익숙한 공간도 여행이라는 컨셉으로 지나면, 발동하는 상상력 덕분에 따분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읽혀지는 소품과 상황들이 즐비하다. 공간너머 프로젝트는 시각을 배제하고 소리로만 타인을 인식하고 상황에 몰입하는 소리 여행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공연은 세 파트로 나눠진다. 먼저, 첫번째 파트는 청소년들이 접속하고 있는 실제 자신의 공간에 대한 집중과 공유로 자신의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며 서로의 공간을 탐색하고 상상하는 시간이다. 두 번째 파트는 안내자의 음성에 따라 언어적인 기능을 가진 소리 없이, 오롯이 사물들로 불러 흘러나오는 소리들을 연이어 들어보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파트를 공간너머로 이동하는 시간으로 이름 지었다. “무한히 상상하세요.”라는 외침과 함께 시작하는 이 소리의 통로는 참여 청소년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익숙하지 않는 자세로, 그러나 추억 소환이 가능한 책상 아래 웅크려 앉은 공간에서 벌어진다.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일련의 틀에 박히거나 누군가의 지시를 통해 시각화하는 과정도 없애고, 오롯이 자신만의 상상으로 이동 시간에 빠져들어야 했다. 이후 세번째 파트는, 소리의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이자, 진행자에게 의해 모두가 눈에 보이는 공간너머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참여자들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듯한 착각을 마주한다. 이러한 작은 변화로 유대감이 생겨난 청소년 참가자들은 다양한 상상력 놀이를 통해 공간너머에 공동으로 모여 앉아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 시간의 러닝타임이 끝나면, 이들은 순식간에 공간너머의 공간에서 목소리를 빼앗기고 현실로 밀려 나가진다.

작은 시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곧 다가올 메타버스 시대에 공간 너머 접촉이 일어나는 지점에 대한 고민하며 그들 각자의 삶 속에서 상상력의 운동을 일으켜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은 시각적인 이미지가 전혀 없는 곳이기도 하면서, 반대로 시각적인 이미지가 가득찬 곳이기도 하다. 공간너머 공연을 통해 청소년 참여자들이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없이 오롯이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어 내었을 이미지를 기대한다. 한 학생의 고백처럼 일상 속에 찾아온 공간너머의 소리 여행이 학업으로 지친 학생에게 숨 쉴 공간이 되었다. 또 다른 학생은 목소리만으로 경험했던 공간이, 단지 목소리 공유 버튼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사라졌던 생소한 경험이 온라인 공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고민이 계속 이어지길, 상상력이 맘껏 풀어지길 응원하며, 프로젝트를 마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간과방의실험실 대표 신은경